

매달린 사람 정방향 ; 자기희생, 인내
이름(@fe40536__)
각성


매달린 사람 역방향 ; 맹목
혜릉(@arfeiniel_)
けものみち
지옥도
이전에 무잔에게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양이들은 말이다, 달빛을 너무 오래 쬐면 이성을 잃고 광분하는 금수가 된다는 얼토당토않는 미신을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하는구나. 흥, 우습기도 하지…’
그때의 무잔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양이를 한껏 비꼬는 말투와 달리 양이의 가죽을 걸치고 매캐한 살 냄새를 풍겼던 그를 떠올릴 수 있었다. 지독하게 맵싸한 향은 양이들이 이성을 꾀어내기 위해 만들었는데, 꽤 쓸 만한 물건이지 않냐며 무잔은 중얼거렸다. 접할 길 없는 불쾌한 냄새에 묵묵히 서있던 코쿠시보를 무시하고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답은 간단하지 않느냐? 눈을 감으면 해결될 일이지. 그깟 것이 두렵다면 저를 장님으로 만들어버리고 평생을 암흑 속에서 연명해야 마음이 놓일지도.’
감기지 않는 여섯 개의 눈도 그 말을 들을 때 두어 번 정도 깜빡이고 있었다.
차고 기울어지는 이치에 따라 저도 무자비하게 휘둘린다면 그저 눈을 감고 모든 번민으로부터 스스로를 내치는 길 또한 답이 될 수 있었다.
함께한 시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비할 바 없이 무거웠고 그들을 갉아먹으며 자란 이성과 광기는 무게를 생각하자니 우스울 정도로 가벼울 뿐이었다. 등에 짊어진 짐이 혈관을 타며 살갗 위로 기어오르는 감각은 여느 혈귀에게 수치였으므로 코쿠시보는 보통 때와 같이 그 달갑지 않은 존재를 수월히 흘러넘기곤 했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육신이 종잇장처럼 갈가리 찢기다 못해 인간들의 발치 아래서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기도 전에 코쿠시보가 도달한 곳은 지옥이었다. 어떠한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므로 고통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짐작했다. 희고 붉은 살점의 파편이 흩뿌려진 흔적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다. 안개가 자욱한 기억의 틈으로 겨우내 떠올린 생모가 일전에 자장가를 들려주듯 귀엣말로 전해준 지옥은 업화로 불타는 처참한 광경을 띠고 있었다.
이곳은 정녕 지옥인가?
혹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멀어 보이는 것은 어둠 뿐인가.
지은 죄에 따라 떨어지는 지옥의 밑바닥이 각기 다른 형태를 갖출 수 있었으나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암흑 속에서 코쿠시보는 죽은 후로 가장 순수한 의문을 품었다. 손을 뻗고 발을 끊임없이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가자니 마치 맹인이 된 듯한 기분이 신경을 파고 들었다.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을 뒤로 한 채 그는 어둠 속에 가려져 있는 낭떠러지를 향해 길을 떠났다.
아무도 가늠하지 못할 시간과 세월이 그의 뒤에 바짝 붙어 그림자로 엮인 발자국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한하게 펼쳐진 지옥은 수라도에 대한 모든 환상을 저버리라는 듯이 공허하고 고독했다. 저승을 관장하는 가장 지고한 존재들조차 혈귀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꺼려했고 추방하기를 원했다. 이는 혈귀들이 단연 모를 수밖에 없는 사실이자 형벌이었다.
빈말로 코쿠시보를 현명하다 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는 목이 타들어갈 만큼의 시간을 통해 암흑 속에서 몸을 숨기고 저를 지켜보는 묘한 기척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일종의 농간을 부리는 배후 또한 접촉을 주저하다 못해 극렬하게 저를 피하고 있으리라는 추측은 확신에 가까웠다.
반복되는 보폭에 속도가 붙어 앞을 향할 때 온 방향에서 공간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을 끼얹은 듯 코쿠시보는 쉴 새 없이 성급하고 촉박한 마음으로 길을 달렸다. 그가 발걸음을 재촉하면 재촉할 수록 기이한 감각들이 옷과 피부에 끈적이며 들러붙었다.
마침내 도달한 종착점은 예상과 달리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손으로 벽을 두드리니 얇고 가벼운 두께가 느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쿠시보는 능숙한 자세로 경계를 허물 수 있었다.
그 곳에는 드넓은 정원이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연못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백년 가까이 자연이 지닌 본연의 녹음을 마주하지 못했던 코쿠시보는 일순 팔로 얼굴을 가렸다. 녹색이 섞인 풍경 위에는 분명 태양이 자리할테며 먼 길을 달려온 이유를 되짚어 보기도 전에 몸이 타들어 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코쿠시보는 천천히 저를 가린 옷자락을 아래로 내렸다. 뜸을 들여 올려다본 하늘은 푸르렀으나 태양 대신 달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달은 코쿠시보를 연못 곁으로 이끌고 있었다. 고요하게 잔물결만 출렁이는 수면을 들여다본 그는 경직한 채 숨을 들이켰다.
연못에 비친 저의 모습은 코쿠시보가 아니었다. 여섯 개의 붉은 눈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얼굴을 만지는 차가운 손끝에 여린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물에 비치는 모습은 그리움을 불러 일으켰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잔영에는 혼란한 감정만이 맺히고 있었다. 그는 이제 두 삶을 살며 받은 이름을 잊은 채로 못에 묶여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수백년 수천년의 시간이 지나도 답은 들리지 않을 터였다.
이곳은 정녕 지옥인가?
자신의 이름은 본래 무엇이었는가?
푸른 허공 위의 달빛은 저만을 비추고 있어 그가 눈을 감아도 진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길은 아득히 멀었다.